생명 (2)

  • 2013-01-10
  • 한성윤

요즘은 아직 새로운 날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아침을 매일 맞이한다. 일어나 움츠렸던 몸을 한 껏 펴면서 깊은 숨을 내쉰다. 숨을 들이마시고 세상을 향해 내쉬는 일은 지금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생명이지만 우리 힘으로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세상에 자신을 내 놓으며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을 준다. 제법 쌀쌀한 아침이면 우리는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우리의 숨길을 볼 수 있다. 입김이다. 매 번 다른 모양으로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도 대기 속으로 은은히 흩어지는 입김. 그래서 입김은 경이롭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생명을 명확하게 다 정의하지도 분명하게 분석하고 규명하지도 못한다. 살아있는 것은 대사 작용이나 생식 능력만은 아니다. 일 벌들은 생식 능력이 없지만 살아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이해하는 일에는 이러한 물질 체계만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생명이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생명을 체험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대사 작용이고 생식 능력이며 낮은 엔트로피 즉, 높은 질서를 유지해나가는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정의들도 들에 만발해 서로의 자태를 뽐내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외치는 경탄과 고치에서 몸을 뒤틀며 세상을 향해 펼쳐대는 나비의 영롱한 날개 빛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담아낼 수는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정의를 내리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생명은 분명 우리의 의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의 의지가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이런 인생의 의미를 알고 이루어갈 때 이를 아름다운 삶이라 부른다. 우리 것이라고 우리 마음대로 자기 생명 즉 인생을 다루면 우리는 주어진 생명이 지닌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말하는 ‘불행’을 경험하게 된다.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시다.(요한복음 10:10) 

생명이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 반대에 단순히 죽음만이 서있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산다는 것의 반대말이 죽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주어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존엄한 것인지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밥그릇 옆에서 이 글을 읽든지, 버려진 신문을 심심풀이로 뒤적이다 읽게 되었든지, 꼼꼼하게 모든 글들을 읽다가 보게 되었든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당신이 귀중하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알려주는 가장 놀라운 사건은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당신이 가진 생명의 진실을 알았을 때, 그 귀중함을 알 때, 당신은 그 생명을 주신 분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명은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도록 부르는 것이다. 다하라 요네꼬가 말하듯이 산다는 것은 놀랍도록 황홀하다. 어린 나이에 자신과 세상을 모두 버리려던 그녀는 오히려 두 다리와 왼 편 팔 그리고 오른 손가락 두개를 잃었다. 살아있는 일은 이제 더욱 절망이었다. 그 때 그녀가 보았던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참 소중함을 알았을 때, 그녀는 죽음보다 강한 생명의 반대말을 보았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었다. 황홀한 영원을 살게 하는 생명은 지금 이 곳에서 당신을 위해 죽음을 삼키신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작되었다. 당신은 소중하다. 황홀할 만큼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