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는 이 어디에 있습니까?

  • 2013-02-26
  • 한성윤

오늘이 서러운 그 날들은 내일마저 어두웠습니다.  스물 여섯해의 짱짱한 젊음도 총 부리를 겨누던 동포의 손 아래서는 절망이 되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힘겹게 잡혀있던 곳을 벗어났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은 이미 땅에 내동댕이쳐진 두부처럼 부수어져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인은 눈물 도랑이 얼굴이 되어버린 겨례와 함께 그마나 서로의 어깨에 묻혀 남으로 남으로 타고 걷고 또 걷고 그렇게 내려갔습니다. 둑을 터치며 넘쳐난 물이 집들을 삼키며 채우듯 남으로 밀려든 피난민들은 해안선 끝에 발을 딛고 그렇게 버티며 살았습니다.


초량동 한 판잣집에서 젊은 시인은 피난길을 차라리 정겨운 추억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과 사람의 절망을 보았습니다. 굶주림에 지치고, 어두움에 지치고, 푸른 군복에 지친 사람들은 서로가 기대었던 어깨 대신에 온통 고슴도치 바늘을 달고서는 서로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소식을 혹 들을까 거리를 헤매이면서 시인의 청춘은 빛을 잃어가는 세대에 스며들어 갔습니다.


신앙의 자락을 붙잡고 살아가기에는 절망이 너무 컸던 것일까요? 믿음은 무관심 속에 묻혀버리고, 사랑은 생존에 먹혀버리고, 소망은 총성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교회는 어두움에 익숙해져 갔고, 겨레는 탄식을 숨 쉬듯 뱉어냈습니다. 쏟아지는 말들은 많았지만 절망을 달래는 말들 뿐, 죽음을 이기는 생명은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뜻있는 지도자들을 잃었고, 오히려 암흑 속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지상 천국을 주겠다는 나팔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소리를 높였고 지치고 길을 잃은 이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칡흑같이 어둡고 절망스러운 역사의 밤을 살아내던 시인은 결국 어둠조차 이겨내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믿음과 소망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 안에서 잠잠할 수 없는 소망의 이유를 세상을 향해 쏟아내고야 맙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자여 어이할고 (석진영 작사, 박재훈 작곡, 1952년) 시인에게 생명수는 지상 천국도 아니요, 인민 해방도 아니요, 방황과 절망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전쟁과 죽음보다 깊은 절망의 자리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 한 분이었습니다.


육십여해가 화살처럼 지나갔습니다. 굶주림이 소망을 갉아먹던 시대가 저편으로 사라진 것 같습니다. 예배당 지붕의 십자가들은 도시를 가득채우고, 믿음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피난 살이를 합니다. 예배당은 그리도 크건만, 우리는 지금도 거짓에 흔들립니다. 거짓과 참혹을 듣고 보고도 또 거짓으로 덮어갑니다. 가득 채운 예배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를 하건만 더 크게 더 높게 더 많이 쌓아가려는 우리들은 더 많은 겨례의 탄식을 짜내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라버렸습니다. 믿음은 풍요 속에 묻어버리고 사랑은 던져주는 돈으로 바꾸어 버리고 소망은 예수님도 앉아 계시기 어색한 지상 천국 예배당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한 몽이던 형제와 자매는 흩어져 부수어집니다. 이제는 밝은 날이라고 외치면서 우리는 칠흑 같이 어두운 역사를 써내려 갑니다. 피난 시절 자신은 수원으로 이미 피했으면서 서울은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방송하던 교회의 지도자들처럼, 우리는 또 안심하라는 소리에 가슴만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죄가 하늘을 찌르건만 교회의 지붕으로 하늘만 가리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봅시다. 우리가 만든 지붕을 뚫어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봅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어져가는 성전이여! 예수님의 제자들이여! 교회여! 대답할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믿는 자여 어이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