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눈꽃이 되어

  • 2016-05-24
  • 한성윤
골목길을 따라가다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 담을 따라 돌면 가끔 뻥튀기 아저씨가 검은 망이 달린 요상한 기계를 돌리다가 “뻥이요” 하며 튀밥을 내던 조그만 마당 터가 나옵니다. 장소로 봐서는 아이들이 모여 놀기 딱 좋은 곳이건만, 금지구역 중 하나였습니다. 거기에는 호랑이 아저씨가 일하는 얼음 가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름 팝니다”고 적힌 양철문 위에 걸린 간판에는 석유와 연탄이라고 큼직하게 쓰여있었습니다. 자전거에 커다란 얼음을 묶고 배달을 하시던 가게 아저씨는 아이들이 가게 앞에서 얼쩡거리기만 하면 큰소리로 야단을 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거운 얼음이나 연탄이 들락거리던 가게 앞에서 아이들이 다칠까 봐 무섭게 하신 것도 같습니다.

냉장고가 보급되지 않던 시절에 시원한 냉국이나 화채를 먹으려면 얼음을 사러 가게로 심부름을 다녔습니다. 여름철이면 거기서 자주 보던 또 다른 아저씨가 있었는데 바로 우리들의 우상 중 한 분이셨던 빙수 아저씨였습니다. 마을 가게 터가 끝나는 어귀쯤에 항상 자리를 잡고 에펠탑처럼 생긴 파란 빙수기를 돌리셨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더위를 한 번에 보내버리는 무지개색 눈밥이 나왔습니다.

손님이 와야 빙수기가 돌았고, 그때는 놀던 아이들까지 몰려와서 그릇에 소복이 쌓이던 얼음 대팻밥을 보며 매번 놀람과 탄식을 보내곤 했습니다. 아저씨의 마술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일단 통에서 미숫가루를 퍼서 얼음 위에 담습니다. 그리고는 팥을 큼직한 숟가락에 담아 얹고 그 위에 하얀 우유(연유)를 뿌리고 쫄깃해 보이는 잘게 썬 떡을 사뿐하게 올립니다.

아이들이 먹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겼으니 벌써 입안에 침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마술의 백미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기계 옆에 가지런히 서 있는 병에 담긴 무지개색 물들입니다. 그때는 빙수의 맛이 바로 저 노랗고 빨간 물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그리도 달콤하고 시원할 수 있겠습니까?

네모난 얼음 곁에는 함부로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음 덩어리가 대팻밥처럼 갈아지면, 입안에 들어와 사르르 녹습니다. 그리고는 입안은 물론이고 뼛속까지 내달리며 숨어있던 더위까지 찾아서 몰아냅니다. 왠지 얼음 덩어리가 되어가는 우리의 마음이 생각납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의 양심이 알고 있는 진실을 더 차갑게 얼려버리고, 단단한 마음에 어린 냉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단 한 영혼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그 위에 눈물을 쏟겠다던 하나님을 향한 서약의 자리는, 오히려 영혼들을 밀어내버리는 차가운 얼음 덩어리로 채워졌습니다. 십자가에 올려놓고 샅샅이 대패질을 해야 합니다. 가진 것이 클수록 더 힘차게 빙수기를 돌려야 합니다. 얼음 덩어리 위에 팥을 올리고 연유를 부어도, 색소로 아무리 물을 들여도 영혼을 울리는 빙수가 되지 못합니다. 얼음이 가루가 되어 눈꽃이 되어야 주님의 제자입니다.